1987.01.14

박종철군 고문으로 사망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1987.01.20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

1987.02.07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에 대한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국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경찰 799명 연행

1987.03.03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 439명 연행됨

1987.04.13

전두환 대통령 4·13 호헌 조치

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4·13 호헌 조치)

1987.04.19

호헌반대운동과 4ㆍ19혁명 기념식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야당과 재야 그리고 사회단체와 학생은 앞 다투어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대학가에서도 호헌조치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범람했는데, 시기적으로 4ㆍ19혁명 기념일에 인접해 있었다.

1987.04.21

호헌반대운동 (1987.04.21~)

4월 후반기에 접어들었으나, 호헌반대운동의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호헌반대운동은 종교계와 전문직을 필두로 하여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 천주교계에서는 각 교구별로 사제가 중심이 되어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호헌철폐와 민주제 개헌 지지’를 주장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기독교계에서는 목회자들이 단식기도를 벌였고, 불교계도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재야인사들도 단식농성에 동참했으며, 교수들은 대학별로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광범위한 대학들에서 교수들이 집단으로 개헌과 민주화를 주장하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시국이 그만큼 엄중함을 의미했다. 사회단체와 직능단체들의 반대운동도 성명서 발표 등으로 표출되었다. 정치권에서는 5월 1일 통일민주당이 창당했는데, 지구당 창당 행사에 정권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가 출현하여 난동을 부렸다. 대학가에서는 1986년 10월에 발생한 ‘건국대사건’의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재기하기 위해 분주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5월 8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가 발족했다.

1987.05.2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사건 진상조작 폭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되었으며, 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

1987.05.23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

재야인사 등 134명, 기독교회관에서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하고, 6월 10일 규탄대회 갖기로 결정

1987.05.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족

민주당·종교계·재야단체 등 발기인 2191명,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대식 거행하고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1987.06.09

이한열 열사 최루탄에 피격

연세대생 이한열 군, 학교 앞 시위 중 최루탄에 부상

1987.06.10

명동성당 농성(1987.06.10-15)

시민과 학생은 6월 10일 서울의 도심지 곳곳에서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시위대가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도 했으나, 진압작전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을지로와 명동 입구 일대의 시위대는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11일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와 연행 작전으로 일부만 겨우 성공했다. 명동성당에 잔류한 760여 명의 시위대는 계획과 준비 없이 예기치 않은 농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으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로부터 배척받기도 했다. 정부와 경찰은 농성자들을 연행할 것이라고 수시로 겁박했다. 경찰이 명동성당으로 진입을 시도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하는 바람에 명동성당 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명동성당 인근에서 근무하던 수천 명의 회사원과 사무원들은 경찰의 시위 진압을 규탄했다. 계성여고 학생들은 도시락을 모아 농성자들에게 전달하는 미담을 남겼다. 안기부와 경찰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 압박을 가하고 프락치를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으나, 천주교계와 농성자들은 굳건히 맞섰다. 6월 14일 농성자의 수는 35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정부는 다음 날까지 해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농성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유예할 것임을 통보했다. 6월 15일 농성자들은 2차례에 걸친 투표를 통해 농성을 풀 것을 결정했다. 이들은 ‘명동투쟁 민주시민, 학생일동’ 명의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2만 여 명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농성을 해제했다.

1987.06.12

회사원·시민 등 1000여 명이 `호헌철폐`를 외치며 시위

명동성당 주변에서 점심식사길의 회사원·시민 등 1000여 명이 `호헌철폐`를 외치며 시위

1987.06.18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최루 가스의 고통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전시처럼 최루탄과 그 파편이 사람을 직접 가격하여 신체의 훼손을 넘어 생명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최루탄에 의한 대표적인 피해 사례는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시에 발생한 김주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과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발생한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을 들 수 있다.

시민과 학생은 6월민주항쟁 기간 내내 경찰의 최루탄 남용을 규탄하고, 더 이상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루탄의 피해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하여 6월 11일 「최루탄 희생자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국민운동본부와 여성단체는 6월 18일 연동교회에서 ‘최루탄 추방 공청회’를 개최했고, 이날을 ‘최루탄 추방 국민결의의 날’로 정했다. 여기에는 최루탄 피해자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

한편, 18일에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진압작전에 계엄군이 투입되면 더 많은 인명이 살상될 것이 명백했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어 우려와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는 전국 16개 도시 247개소에서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20일 비상조치가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군대의 이동도 목격되었다.


1987.06.20

불교계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진행

경찰의 원천봉쇄 속 종로1가 소재 조계사에서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진행, 승려 70여 명과 신도 1백여 명이 법회 후 조계사 앞 큰 길로 시위행진.

1987.06.21

기독교대한감리회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

오후 5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신도 및 학생 2000여 명, 종교교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진 뒤, 이 가운데 800여 명이 교회 밖으로 진출 1시간 동안 시위.

1987.06.26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1987.06.29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 6·29 선언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6·29 선언)

1987.07.01

전두환 전 대통령,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

전대통령,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6·29선언 8개항을 모두 수용 - 파주여자종합고 전교생 시위, 학내민주화와 교장 및 폭력교사의 퇴진을 주장

1987.07.06

이천경찰서 소속 전경 양승균, 양심선언 발표

서울지역 대학생 8000여 명, 연세대에서 이한열 추모집회 후 시위 - 이천경찰서 소속 전경 양승균, 양심선언 발표 후 NCC에서 농성

1987.07.09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시민·학생 1백만여 명, 서울 시청 앞 운집,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

1987.07.15

87노동자대투쟁(7월~9월)

6월민주항쟁은 길게 보면 6개월, 짧게 보면 한 달 여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특정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행사를 개최한 날에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발생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시민이 항쟁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오후 또는 저녁 무렵에 집회를 열었다. 항쟁이 지속되면서 시민의 참여는 점점 증가했는데,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노동자의 참여가 눈에 띠게 늘어났다. 명동성당 농성투쟁 기간 동안에는 장소의 특성상 ‘넥타이 부대’라고 명명되었던 금융ㆍ사무직 종사자들이 함께했다. 밤늦게까지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산업노동자와 기층민의 참여도가 높았다. 노동자들은 6월민주항쟁을 경험하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병영적 노동통제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할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6・29선언’은 대통령직선제 등 정치적 민주화만 어느 정도 보장했을 뿐 노동자ㆍ농민 문제의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6ㆍ29선언’으로 폭압적인 통제가 여의치 않게 된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부문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따라서 87노동자대투쟁은 6월민주항쟁의 연속이며,6월민주항쟁의 산업현장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 집단행동의 전개 양상

87노동자대투쟁은 7월에 시작되어 10월 초에 일단락되었다. 6월민주항쟁이 87노동자대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때로는 집단적으로 6월민주항쟁에 참여했는데, 항쟁이 마무리되고 일상으로 돌아온 작업장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던 사업장은 드물었고, 그나마 사용자와 결탁되어 있거나 지시를 받았다. 임금협상은 형식적이었고, 사용자가 제시한 수준 이하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근무시간은 무시되기 일쑤였으며, 부당한 노동도 만연되어 있었다.
87노동자대투쟁 기간 발생한 노동쟁의는 총 3,255건이었고, 1,218,0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1986년에 발생한 노동쟁의 276건과 비교하면, 이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치이다. 노동자의 주된 요구는 노동기본권 준수와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이었다.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이 노사협상의 주요 쟁점이기는 했으나, 보다 우선되었던 점은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 보장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거의 모든 산업현장에서 요구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사업장의 규모와 직종, 지역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요구가 분출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는 믿음직한 대표를 원했다. 이는 ‘현장민주화’로 표출되었다. 아울러 민주적 노사관계에 대한 요구가 급증했으며, 각종 차별을 철폐하는 것도 주요 쟁점이었다. 87노동자대투쟁은 중화학공업 지역에서 시작되어 경공업 지역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노동쟁의의 주체와 산업 그리고 성별과 지역이 이전과 크게 차이를 보였다. 경공업 중소기업에서 중화학공업 대기업으로, 분산되거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대규모 공단지대로, 여성노동자에서 남성노동자로 변했다. 이것은 향후 한국 노동운동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87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거제도 대우조선에서 근무하던 한 노동자가 사망했다. 8월 22일 경찰이 김우중 회장을 면담하기 위해 집결한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난사했는데, 이석규가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둔 것이다.

1987.07.21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전국 28개대 교수 534명,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1987.07.30

현대미포조선소 파업

현대미포조선소 노동자 1800여명, 근로조건 개선 등 요구 파업 농성

1987.10.27

대통령중심 직선제에 관한 새 헌법안, 국민투표로 확정. 찬성 93.1%

대통령중심 직선제에 관한 새 헌법안, 국민투표로 확정. 찬성 93.1%

1987.11.20

공정선거감시운동(1987. 11.∼12.)

국민운동본부는 11월 말부터 대통령 선거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각종 기구, 지역, 대학별로 ‘공정선거감시단’을 발족시켰다.

1987.12.09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

서울지역 25개 대학생 2만여 명,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주최로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를 갖고 6·26 국민평화대행진 적극 참여 결의.

1987.12.16

16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제13대 대통령선거 실시, 노태우 후보 당선 - 공정선거 감시단 소속 대학생 등 100여 명, 부재자투표함 밀반출을 적발하여 구로구청사 봉쇄하고 농성(구로구청농성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