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노동자대투쟁(7월~9월)

6월민주항쟁은 길게 보면 6개월, 짧게 보면 한 달 여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특정하게 의미를 부여하여 행사를 개최한 날에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발생했다. 국민운동본부는 시민이 항쟁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오후 또는 저녁 무렵에 집회를 열었다. 항쟁이 지속되면서 시민의 참여는 점점 증가했는데,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노동자의 참여가 눈에 띠게 늘어났다. 명동성당 농성투쟁 기간 동안에는 장소의 특성상 ‘넥타이 부대’라고 명명되었던 금융ㆍ사무직 종사자들이 함께했다. 밤늦게까지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산업노동자와 기층민의 참여도가 높았다. 노동자들은 6월민주항쟁을 경험하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병영적 노동통제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개탄하고, 이를 극복할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6・29선언’은 대통령직선제 등 정치적 민주화만 어느 정도 보장했을 뿐 노동자ㆍ농민 문제의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6ㆍ29선언’으로 폭압적인 통제가 여의치 않게 된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부문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따라서 87노동자대투쟁은 6월민주항쟁의 연속이며,6월민주항쟁의 산업현장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 집단행동의 전개 양상

87노동자대투쟁은 7월에 시작되어 10월 초에 일단락되었다. 6월민주항쟁이 87노동자대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때로는 집단적으로 6월민주항쟁에 참여했는데, 항쟁이 마무리되고 일상으로 돌아온 작업장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던 사업장은 드물었고, 그나마 사용자와 결탁되어 있거나 지시를 받았다. 임금협상은 형식적이었고, 사용자가 제시한 수준 이하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근무시간은 무시되기 일쑤였으며, 부당한 노동도 만연되어 있었다.
87노동자대투쟁 기간 발생한 노동쟁의는 총 3,255건이었고, 1,218,0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1986년에 발생한 노동쟁의 276건과 비교하면, 이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치이다. 노동자의 주된 요구는 노동기본권 준수와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이었다.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이 노사협상의 주요 쟁점이기는 했으나, 보다 우선되었던 점은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 보장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거의 모든 산업현장에서 요구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사업장의 규모와 직종, 지역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요구가 분출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는 믿음직한 대표를 원했다. 이는 ‘현장민주화’로 표출되었다. 아울러 민주적 노사관계에 대한 요구가 급증했으며, 각종 차별을 철폐하는 것도 주요 쟁점이었다. 87노동자대투쟁은 중화학공업 지역에서 시작되어 경공업 지역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노동쟁의의 주체와 산업 그리고 성별과 지역이 이전과 크게 차이를 보였다. 경공업 중소기업에서 중화학공업 대기업으로, 분산되거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대규모 공단지대로, 여성노동자에서 남성노동자로 변했다. 이것은 향후 한국 노동운동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87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거제도 대우조선에서 근무하던 한 노동자가 사망했다. 8월 22일 경찰이 김우중 회장을 면담하기 위해 집결한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난사했는데, 이석규가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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