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월 항쟁의 개요

6월 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6월민주항쟁, 6·10민주항쟁, 6월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13호헌조치, 그리고 시위 도중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민정당 대선후보 노태우는 민주화를 위한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실질적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과거사 청산을 가져오지는 못하였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함으로써 경제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2. 1987년, 6월 항쟁은 왜 일어났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로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초기 발표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4.13 호헌조치)

하지만,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차질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호헌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 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정부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하였다. 이에 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그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다.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고, "호헌조치 철최 및 직선 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개최된 가운데, 참가 학생 이한열이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하여 쓰러졌다. 6월 10일 잠실운동장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고,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소식을 듣고, 서울시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재야민주세력 그리고 대학생은 물론 30대 직장인까지 대거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끝내 7월 5일 사망하였다.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민주국임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이는 6월항쟁을 임계점으로 이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3. 87년 6월항쟁 이후,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6월항쟁의 결과 ‘6.29선언‘이라는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특별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다. 6월항쟁은 시민 저항을 통해 독재정부의 장기집권 의도를 저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다는 의미가 있으며,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6월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다. 이후 노동자들이 생존권 확보 및 노동조합 결정에 나서며 나타난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만한 현상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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